대학은 무엇보다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둥은 언제 어느 때고 쉽게 허물어져 버릴 것만 같다. 그것은 학생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대학 본연의 고귀한 뜻이 의심할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로 스쿨버스 운행의 불편함을 지적하고 싶다. 등교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서서 스쿨버스에 몸을 싣고 출발할 때면 어쩔 수 없는 답답함과 짜증이 밀려온다. 동시에 학생들을 위한 배려가 이루어지지 않는 데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진다. 스쿨버스를 타기 위해 몰려드는 학생들에게는 '자리 맡아내기'에 대한 강박관념이 생긴 듯하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뒤쳐진 이들과 더불어 다음 장소에서 차에 오르는 사람들까지 비틀비틀 선채로 하루의 첫 시작이 힘겹기만 하다. 많은 사람들을 싣고 가는 스쿨버스의 움직임도 무겁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마땅히 돈을 지불하고도 불편이 오는데에 대하여 '차 한대 안대줘?'라는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게다가 더 뒤로 물러서서 타라는 기사 아저씨의 말이 얄밉게 느껴지는 것은 학생으로서 느끼는 어쩔 수 없는 실망감이 큰 탓이다.

 하교할 때도 스쿨버스에 탑승하기 위해 차가 오기 30분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한다. 자리 맡아내기에 대한 힘겨움으로 얻은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 지혜는 아는 친구의 옆에 몰래 껴서 차에 타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의 목소리를 대학이 들어주길 바란다. 언제나 학생들의 요구는 공허한 외침으로 끝난다. 몇번의 투쟁을 통해 힘겹게 얻어내는 결과가 보여주듯, 한번의 요청으로는 도무지 끝나는 법이 없다. 학생과 대학이 갈등관계에 놓이면, 어떤 득도 가져올 수 없다.

 되도록 갈등을 서둘러 해결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대학이 최소한 학생들의 편의를 뒷받침하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 선행될 때 학생들도 즐거운 얼굴로 가슴깊이 고마움을 느끼며 자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세 미 (국어교육과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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